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 폭발 사고 (문단 편집) == 미비했던 언론보도 == >'''"성수대교 책임자에 대한 처벌은 왜 그렇게 약해요. 그런 식으로 하니 대형 참사가 계속 터지는 게 아니오.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XX놈이라니까."''' >'''"성수대교 붕괴 사고와 북아현동 도시가스 사고 때는 [[서울 공화국|하루 종일 보도하면서]] 대구에서 발생한 참사에 대해서는 왜 보도를 하지 않습니까?"''' >- 참사 당시 [[세계일보]]에 걸린 독자들의 전화 내용 중 일부. 위와 같이 정치판이 개판이었던 데다 당시 여당인 [[민주자유당]]의 텃밭인[* 다만 문민정부 출범 이후 [[민주자유당|민자당]] - [[신한국당]]은 상인동 사고 이전에도 대구 지역 선거에서 한 번도 승리하지 못했다.] 대구에서 일어난 사고라 대형 사고임에도 언론이 축소 보도한다는 의혹을 많이 받았다. 또 지방에서 일어난 일이라 대형 사고임에도 불구하고 취재가 어려웠다는 식으로 둘러대는 경우도 있었는데 당시 대경권 지역방송국은 TV/라디오 통틀어 [[KBS대구방송총국|KBS대구]], [[대구문화방송|대구MBC]], [[기독교대구방송|대구CBS]] 3개가 존재했고[* 당시 [[SBS]]계 지역민방 [[TBC]]는 개국 2주 전이었고 라디오방송사 [[대구가톨릭평화방송|PBC]]와 [[대구불교방송|BBS]]도 아직 대구지역국을 개설하지 않았다.] 또 이를 취재했음을 감안하면 납득이 안 가는 변명에 불과하다. 이전에 발생한 [[성수대교 붕괴 사고]] 당일에는 하루 종일 뉴스 특보를 했던 방송 3사라 국민들의 화는 들끓었다. 그래서인지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이틀 뒤에 벌어진 그 대형 참사]] 때는 철야 방송까지 하며 논란을 종식시키려 노력했다. 하지만 이것도 [[서울특별시|서울]]에서 발생한 사고였기 때문에 이 폭발 사고 언론 홀대에 대한 대구 시민들의 분노는 전혀 누그러들지 않았다. 특히 공영 방송 [[KBS]]의 태도는 더욱 지탄을 받았는데 [[KBS 1TV|1TV]]가 사고 당일에 10시 15분에 방송을 끝냈고 오후에 [[동대문야구장]]에서 열린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 준결승 경기를 생중계해서 빈축을 샀다. 당시 공익성을 강화한다고 1TV의 광고를 폐지하고 수신료와 전기료의 합산 징수를 시행한 지 약 7개월 정도 지났을 시점인데다 시청료 거부 운동이 전국적으로 퍼진 지 10년이 안 되었을 시점이니 수신료와 전기료 합산 징수만 아니었으면 수신료 징수율이 다시 한 번 내려가도 할 말이 없었을 수준이었다. 다만 여기에는 뒷사정이 있어서 KBS는 11시부터 공보처에 뉴스 특보 방영 목적으로 방송 시간 연장 허가를 신청했는데도 허가가 나지 않았고, 그럼 자막이라도 내게 해 달라고 사정사정해서 허가받고 자막 속보를 낸 시간이 14시 02분부터였다. 속보 방송 승인은 14시 50분에야 얻어냈고 55분부터 13분간 뉴스 특보를 한 게 전부였다. 이는 당시 [[공보처]]의 방송국 허가장 일부 규정 때문이었는데, 지상파가 정파 시간에 긴급 속보를 때려야 될 경우에는 사전에 공보처에 얘기를 한 뒤 허락을 받아야 방송을 할 수 있었다. '방송 질서 유지' 명목이었지만 국민의 알 권리를 침해한다는 논란이 일었고 결국 [[국민의 정부]] 시절에 이 시책은 없어졌다. 1994년 10월 당시 [[충주 제5호 화재사고|충주호 유람선 화재 사건]] 당일에 [[MBC]]와 함께 9시 뉴스 시간에 해당 사건을 뒤로 보낸 채 김영삼 대통령의 [[성수대교 붕괴 사고]] 관련 담화를 헤드라인으로 내보낸 바 있었고 12월 발생한 [[아현동 도시가스 폭발 사고]] 당시에도 오후 방송 개시 5분 전부터 뉴스 속보를 들어갔다는 이유만으로 편성 관련자가 징계를 받은 전적이 있어서 KBS는 위에서는 [[높으신 분들]] 눈치 보느라, 아래에서는 국민들의 눈치를 보느라 이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MBC]]도 상황은 마찬가지여서 공보처에 아침 방송 시간 20분 연장[* 당시 평일 오전 방송은 10시에 종료하고 정파했다.]을 신청한 게 전부였고 그 날 저녁 [[인기가요 베스트 50]]도 정상적으로 생방송했다. 다만 이 프로그램의 당시 MC였던 [[신은경]]-[[김지수(1972)|김지수]]가 오프닝에 이번 참사에 대한 애도의 뜻을 표한다는 멘트를 날리긴 했지만... 방송 성격이 성격이다 보니. 여하튼 이 때의 참상으로 방송계에 대한 비난이 하도 일다 보니 공보처에서도 뜨끔했는지 1995년 9월 4일에 오후 방송 시작 시간을 17시 30분에서 17시로 앞당긴 것을 시작으로 1997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지상파 방송 시간을 연장하는 데(6시~12시, 16시~다음날 1시)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 이전에도 세계화 명목으로 방송 시간의 연장 계획 자체는 있었지만 지상파 낮 방송을 노동 생산성 저하의 원흉으로 보는(...) 공보처와 방송위원회의 고리타분함에다 신문사들의 반발 등을 감안해 1993년 11월 심야 방송 시간을 1시간 늘린 것을 제외하면 제대로 진행된 것이 없었음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이 외에도 [[지상파]] 방송 3사 모두 사고 당일 저녁에 예능 프로그램을 그대로 방송해 욕을 먹었다. 결국 대구 시민들은 들고 일어나 5월 4일에는 방송개혁국민회의 선거방송대책본부가 서울시청 뒤편 한국프레스센터에서 '대구참사 왜곡방송 규탄집회'를 열었고 대구에서도 며칠 동안 시민단체 중심으로 시위를 벌였으며 KBS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까지 걸었으나, 1997년 4월에 서울지방법원은 보도가 별로 안 되었던 건 알 권리 침해가 아니었다며 패소 판결을 내렸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4276870|#]] 그 외에도 신생 진보 언론 <[[미디어오늘]]>이 '안기부 언론팀 건재'를 폭로할 당시 해당 참사 축소 보도에 안기부가 [[http://www.mediatoday.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10179|개입된 게 아니냐는]] [[http://www.mediatoday.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7276|주장도 나왔다.]] > [[파일:0P1gwcy.jpg]] > {{{-3 사고 당일 MBC 뉴스 특보 방송 장면. [[대구문화방송|대구MBC]] 50년사에서 발췌.[br]좌측 서울 스튜디오에 나오는 이는 [[손석희]] 앵커다.}}} > "선배님 큰일났습니다. 여기에 도시가스가 폭발해 다 날아갔습니다" > "흥분하지 말고 눈에 보이는 거 다 얘기해봐" > "지하철 공사장에서 도시가스가 폭발해 복공판이 50미터까지 튀어올랐답니다. 사람들 시체가 여기저기 있어요. 버스도 불에 타고 트럭, 택시, 승용차 수십 대가 박살났습니다. 지하철 저 아래로 떨어졌어요. 건물도 눈에 보이는 건 죄다 부서졌어요." > - 당시 첫 취재 내용을 보고하던 대구MBC [[오태동(정치인)|오태동]] 기자 - 김세화 기자의 대화 중. > "여긴 지금 상인네거리. 지하철 공사장에서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복공판이 완전 붕괴되었습니다! '''사망자, 부상자가 도대체 몇명인지 알 수 없을 정도입니다. 지금 제 옆에도 시신이 있습니다!'''" > - 사고 지점에 있던 대구MBC <푸른 신호등> 통신원 전화 연결 중. 한편 사건 보도는 MBC가 제일 빨랐다. 사고 당시 방송을 막 끝내려던 참이었던 대구MBC 라디오 <푸른 신호등>[* 대구MBC 라디오에서 지금의 <[[시선집중]]> 1, 2부 시간대(당시 시간으로는 7시 20분)에 방송했었던 출근길 교통 정보 프로그램. [[대구교통방송]]이 개국하고 얼마 후에 폐지됐으며 '여론현장'으로 대체됐다. 현재는 평일 8시 35분으로 이동했다.]에서 후반 CM을 내보낸 뒤 클로징하려는 순간 여기저기서 제보 전화가 걸려왔고 그 중 통신원 1명을 전화로 연결한 것이 사건 보도의 시작이었다. 같은 시간 여러 시민들의 제보를 받은 보도국에서는 마침 사고 지점 근처를 지나가던 취재 기자를 통해 제보 5분만에 사고를 파악해 속보를 내보냈다. 개국 초기이던 케이블 뉴스 채널 [[YTN]]도 24시간 동안 뉴스를 내보냈으나 당시에는 서울 지역에만 케이블TV 회선이 설치되어 있어 큰 반향은 없었다. 방송에서는 상당 시간 동안 침묵하고 있었지만 당시 [[하이텔]], [[천리안]], [[나우누리]] 등 [[PC통신]]에서는 사고 현장이 보이는 아파트 등의 사용자, 해당 사고 현장을 지나온 사용자 등을 통해 게시판에 거의 생중계에 가까운 현장 목격담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제는 [[언론]]을 통제해도 정보의 전달을 막을 수 없게 된 시대가 온 것이다.''' 사이버스페이스의 어마어마한 위력을 [[대한민국]]에서 처음으로 피부에 와닿게 현실화시켜 보여준 사건이었다. 2010년대 들어 [[스마트폰]]이 보급되면서 사건이 터지면 즉시 SNS에 널리 퍼지는 추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